목록1일 1작_ 아무거나 쓰기/소설 (5)
연주하는 펜, 글을 적는 기타
나는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끈한 이마, 움푹 패인 눈과 검은 눈동자, 눈 사이에서 인중까지 이어지는 콧날, 립스틱을 발라 윤기나는 입술 그리고 베일 것 같은 턱선. 그녀는 파란색 페도라를 쓴 젊은 남자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나와 그녀의 거리는 약 오 미터. 그녀는 온 정신을 자신의 그림에 쏟아붓는 듯 단 한 번도 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벤치에 앉아 그녀를 더욱 더 자세하게 관찰했다. 그림 그리기를 마친 그녀가 남자에게 초상화를 건넸다. 그녀에게서 초상화를 건네받은 남자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표정은 보면 볼수록 흥미로웠다. 눈썹은 웃고 있는데 입술은 굳게 다문, 그냥 이상한 표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초상화를 찢었다. 찢은 것으로도 모자라 라이터..
그는 땀에 젖은 셔츠를 입은 채로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들어선다. 처음 가는 카페인 듯 카운터 앞에서 머뭇거린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기 위해 그를 쳐다보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메뉴 목록을 눈으로 훑는다. "어떤 걸로 주문하시겠어요?" 고객과 점원 사이에 흐르는 침묵을 결국 점원이 깼다. 점원의 물음에도 그는 멍하니 메뉴판을 응시한다. "글쎄요……. 뭘 먹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점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다. 웃는다기보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에 가깝다. 그는 계속해서 메뉴판만 올려다본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다. 의도적이지 않은 그의 침묵에도 종업원은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서서 기다린다. 그는 결심한 듯 점원을 응시한다. "달달한 헤이즐넛라떼 한 잔 주세요." 그는 말을..
여자 여자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여자의 오른손은 관자놀이에, 왼손은 다리 사이에, 몸은 옆으로 기울었고, 숨소리는 낮았다. 이불은 반쯤 덮여진 상태였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나는 침대 앞에 놓인 거울이 있는 화장대 앞에 섰다. 거울에 내 모습이 비췄다. 퀭한 눈에 제멋대로 자란 수염. 셔츠는 어디에 벗어뒀는지 그리고 팬티도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몸인 상태였다.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나는 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모텔 방에 들어온 것도, 방에 들어올 때 여자를 데리고 온 것까지, 그리고 침대가 젖을 만큼 격렬하게 움직였던 일 모두,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술을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마신 것인가.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마시고 이름도 나..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맞으며 서 있다. 땀을 쏟아내며 일하던 날 이후 맞이하는 휴식의 기간에 나는 발꿈치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내 삶을 아우르는 기억의 한 조각을 집게손가락으로 벌리면 그 속엔 너와 했던 모든 것이 떠오르곤 한다. 한 번은 여수의 밤 바다를 보기 위해 무작정 기차를 탔다. 늦은 밤 기차가 잠든 승객을 태우고 까맣게 흘러내린 물감 같은 밤에 빛으로 구멍을 내며 끝없이 달렸다. 나는 그 안에 타 있는 승객들 중 한 명이었다. 단지 여수라는 지역과 밤의 바다를 보기 위해 깨 있었는데 그 밤은 이상하리만치 하얗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잠든 옆자리 승객에 눈길을 주는 일을 반복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모래사장 위의 소라껍질 대신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선박들뿐이었다. 너와..
하염없이 내리는 눈꽃을 맞으며 나는 11번가를 걸었다. 이 세상에 사람은 나 혼자뿐이라 생각하며. 나를 스치며 지나가던 사람이 실수로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도, 미안해요, 괜찮아요, 같은 말을 주고받지 않은 채 그저 나는 걸었다. 주황색 가로등이 나를 비췄다. 영화에서 나오는 연출, 그러니까 내가 가로등을 지나칠 때마다 하나씩 꺼지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저 내 앞길을 벌겋게 물들이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살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은 뒤로 한 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 내게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나요, 하고 묻는다면 고개를 한 번 가로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답이기 때문이다. 왠지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는 중이라고 답하면 정말로 우린 이별을 했다고 믿게 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