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하는 펜, 글을 적는 기타

[엽편소설] 소나기 (가제) 본문

1일 1작_ 아무거나 쓰기/소설

[엽편소설] 소나기 (가제)

ClarkKim 2018. 4. 3. 23:41

   하염없이 내리는 눈꽃을 맞으며 나는 11번가를 걸었다. 이 세상에 사람은 나 혼자뿐이라 생각하며. 나를 스치며 지나가던 사람이 실수로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도, 미안해요, 괜찮아요, 같은 말을 주고받지 않은 채 그저 나는 걸었다. 주황색 가로등이 나를 비췄다. 영화에서 나오는 연출, 그러니까 내가 가로등을 지나칠 때마다 하나씩 꺼지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저 내 앞길을 벌겋게 물들이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살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은 뒤로 한 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 내게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나요, 하고 묻는다면 고개를 한 번 가로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답이기 때문이다. 왠지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는 중이라고 답하면 정말로 우린 이별을 했다고 믿게 될 테니까.

   나는 그녀와 헤어진 게 아니다, 이별한 게 아니라 잠시 관계에 있어 쉬고 있는 것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다. 좀 더 오래 만나기 위해 여기서 이렇게 걷고 있는 거라고, 단지 그뿐인 거라고.

   수많은 점들로 꾸며진 가로등, 불 꺼진 어느 가로등 아래에 섰다. 정말로 헤어진 걸까. 초저녁이면 항상 울리던 휴대전화. 뭐해, 하고 묻던 그녀의 습관들. 문득 그녀의 사소한 버릇이 생각났다.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면 머리를 쓸어넘기며 미간을 찌푸리던 모습, 거짓말을 할 때면 제 긴 머리칼을 꼬던 모습, 그런 사소한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내 눈앞에 펼쳐져 나도 모르게 픽, 쪼그려 앉았다. 다시 힘차게 일어서 앞에 놓여진 가로등 아래를 걸을 자신이 없어 오래도록 그렇게 앉아 있었다.

 

2018.04.03

일필휘지로 적어낸 짧은 장면 내지 소설

ClarkKim.

'1일 1작_ 아무거나 쓰기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 젊은 화가  (0) 2019.05.17
[소설] 달달한 헤이즐넛라떼 한 잔 주세요  (0) 2019.05.15
[소설] 여자  (0) 2019.05.13
[엽편소설] 환영  (0) 2019.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