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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작_ 아무거나 쓰기/소설

[엽편소설] 환영

ClarkKim 2019. 2. 22. 21:44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맞으며 서 있다. 땀을 쏟아내며 일하던 날 이후 맞이하는 휴식의 기간에 나는 발꿈치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내 삶을 아우르는 기억의 한 조각을 집게손가락으로 벌리면 그 속엔 너와 했던 모든 것이 떠오르곤 한다.

  한 번은 여수의 밤 바다를 보기 위해 무작정 기차를 탔다. 늦은 밤 기차가 잠든 승객을 태우고 까맣게 흘러내린 물감 같은 밤에 빛으로 구멍을 내며 끝없이 달렸다. 나는 그 안에 타 있는 승객들 중 한 명이었다. 단지 여수라는 지역과 밤의 바다를 보기 위해 깨 있었는데 그 밤은 이상하리만치 하얗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잠든 옆자리 승객에 눈길을 주는 일을 반복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모래사장 위의 소라껍질 대신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선박들뿐이었다.

  너와의 시간도 그랬다. 분명 서로를 알기 위해 기억조차 나지 않는 밤을 잿더미가 될 때까지 불태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타고 남은 장작조차 없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우리는 뭘 했는가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끝없이 눈을 바라보던 그 순간은, 차 안에 앉아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다 문득 잡았던 너의 손은, 한껏 달아올라 주체하지 못하던 첫 입맞춤은, 침대에 누워 젖은 몸을 감싸안던 순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니 원피스에 크로스백 차림을 한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하기 위해 실눈을 떴다. 찬찬히 훑어보다 보니 기억났다. 를 잊고 새롭게 만나던 여자. 나는 손을 흔들며 여자에게 발걸음을 옮긴다. 걷다가 문득 두고 온 물건이라도 있는 양 뒤를 돌아본다. 그곳엔 역시 네가 있다. 나는 걸어가면서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본다. 역시 너도 손을 흔든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찰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헤어짐은 헤어짐일 뿐 그 이상이하도 아니기에. 새롭게 만나는 여자를 만나자마자 입을 맟추고 포옹을 했다.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그렇기에,

  시작점에 함께 선 새로운 너를 환영한다.

 

2019.02.22

Clark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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