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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특별함을 찾아내다

한여름 밤의 오아시스

ClarkKim 2019. 4. 18. 00:39

  간만에 바Bar에 갔다. 나는 바를 즐겨찾는 것도 그렇다고 소홀한 것도 아니고 딱 중간 정도로 찾곤 한다. 그날따라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그 바가 가고 싶어졌다. 앞선 자리에서 적당하게 마신 후 간 거라 몽롱한 정신을 겨우 유지하며 올라섰다. 자리는 긴 탁자를 사이에 둔, 바 메이드와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자리였다. 앉아서 뭘 마실지 고민하다가 결국 고른 건 미도리샤워였다. 나는 미도리샤워를 종종 마신다. 처음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 중 『상실의 시대』의 인물 '미도리'가 생각나 골랐는데, 마시면 마실수록 자꾸 찾게 됐다. 그래서 바에 가면 십중팔구 첫 잔은 미도리샤워이다. 바 메이드가 칵테일을 만드는 동안 나는 이름 모를 몇 병의 양주를 보고 있었다. 마침 바 메이드가 만들어온 칵테일을 내게 건넸다.

  "어떤 거 보고 있어요?"

  "한 번쯤 마시게 되면 어떤 걸 마실까 고민중이었어요."

  나는 선반 위에 있는 양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 메이드는 자신도 많은 걸 알고 있진 않지만 마셔본 것 중엔 이것도, 저것도 괜찮다며 소감을 얘기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한 어떤 얘기에 바 메이드가 환하게 웃었다. 그때 나는 문득 언젠가 호감을 가졌던 여자를 떠올렸다. 왜냐하면 바 메이드의 웃음이 그 여자의 웃음과 굉장히 흡사했다. 마치 그 여자가 내가 사는 동네의 바로 일하러 온 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나는 웃음에 빠졌다. 그녀가 지어보이는 그 웃음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가 생각나는 그 웃음. 이를 모두 드러내고 웃는 그 모습,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닮았다. 호감을 가졌다가 놓아버린 후로부터 시간이 꽤 지나서 우리가 무엇을 나누었는가에 대한 건 엽편소설을 두세 조각으로 갈라놓은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여전히 선명하다. 앞에서 웃으며 얘기하는 바 메이드를 보며 나는 멍하니 넋을 잃다가도 정신을 차리기를 조금씩 반복했다. 기억이란 건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각주:1]바 메이드의 웃음이 과거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자의 웃음과 많이 비슷하다고 느끼면서, 평소 생각하지도 않던 일들이 조금씩 의식 위로 올라온다는 게.

  바 메이드는 총 셋이었는데 그들은 유동적으로 자리를 이동하며 나를 포함한 다른 손님들과 얘기를 했다. 나와 얘기하던 바 메이드가 잠깐 자리를 비우자 옆에 있던 바 메이드B가 왔다. 무어라고 내게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온 신경이 처음의 바 메이드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그 여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에게서 나오는 웃음을 바 메이드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아무런 감정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쯤 나는 알코올에 절어 있던 정신을 흔들어댔다. 그렇다. 한때 나는 그 웃음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게 이제 와서 무엇이 중요한가. 바 메이드가 짓는 웃음은 그 여자가 아니며, 또한 이제 나는 그 여자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호감도 이미 멀리 떠나보낸지 오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을 최소한의 호감 정도만 남아 있을 뿐.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가리타를 주문해서 조금 마시다가 그것마저 그만뒀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잠깐 동안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술 기운이 깨기는커녕 더 올라왔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 웃음으로 비롯된 감정을 다시금 떠나보내려는 준비였다. 가끔씩 찾아오는 모든 것들 중 버려야 할 것을 버릴 땐 그러한 행동이 필요할 때도 많다. 집까지 가지고 들어가기 싫은 것들 말이다. 생각이 나지 않을 때까지 쭉 잡고 있다가 털어버리고 생각이 나지 않을 때서야 집 안에 들어섰다. 

 

2019.04.17

ClarkKim

  1. 『상실의 시대』대목 인용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