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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하는 펜, 글을 적는 기타
그리운 막차 송종찬 사랑할 때 나는 매일 막차를 탔다 차창에 기대어 전주에서 부안까지 솜처럼 연한 잠에 빠져들곤 했다 조금 조금만 하다가 막차를 놓치고 낡은 수첩을 뒤적일 때 그러나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까지 막차는 어서 오라 손짓했다 한여름의 폭우 속에서도 막차는 반딧불 같은 라이트를 켜고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갔다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달려 막차는 집도 없는 종점에서 잠이 들었고 찬 이슬 새벽 첫차가 되어 해를 안고 내 곁을 떠나갔다 시의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나보다. 삶을 살면서 누구나 연애를 한다. 설령 연애를 못해봤다 하더라도 짝사랑을 하며 남 몰래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속에 투영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한 마디로 애인과 사랑을 나눈다. 이 시의 화자도 여느 ..
아버지 김희식 백중 장날 하루 종일 쏘다니다 배가 고파 들어오면 아버지는 이미 집안을 한번 뒤집어 놓고 주무시고 계셨다 나는 차라리 저런 아버지는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기성회비 수업료 못 내 복도 양끝 작은형과 마주보며 청소하던 날 하얗게 피어나는 달무리 보며 보리개떡이나 실컷 먹고 싶었다 한길가 집들 중 새마을 사업 안 한 집 유일하게 우리뿐이라 동네 이장이 찾아와 아버지와 말다툼하고 가던 날 아버지는 그 날도 장터 모퉁이 골목집에서 동네가 떠나가라고 술 취해 소리 지르며 공화당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방 한 칸에 남은 여섯 식구 숨죽이며 울음 깨물고 골 패인 지붕엔 오랜만에 한줄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자상한 아버지 되어 수염 난 볼로 우리의 얼굴 부빌 때가 잦았다 ..
즐거운 제사 박지웅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