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1일 1작_ 아무거나 쓰기/시 (9)
연주하는 펜, 글을 적는 기타
누군가 나무를 흔들고 지나간 덕에 나의 눈 앞으로 봄 한 철 그득이 핀 벚꽃 잎이 잔뜩 쏟아져내린다 아, 이 흐드러진 아름다움이여! 잠시 자리에 서서 미(美)란 무엇인가 고민하다가도, 내가 느낀 아름다움이 어쩌면 벚나무에게는 영원한 작별이 아닐는지, 하여 우산을 펼치듯 두 팔 벌려 벚꽃 잎을 가슴에 안는다 이것이 벚나무에게 심심한 위로가 되기 바라며 안녕 ClarkKim, 전문, 자작시 2024 .04 .08 (월)
잔뜩 목이 마른 어느 날 누군가 고운 손길로 씻어놓은 붉디붉은 사과 한 입 베어물면 달큰한 맛이 입 안 가득 풍긴다 정신없이 사과 한 알 목구멍으로 넘겨놓고 나서야, 깨닫는다 숨가쁘게 달려온 내 삶에 신이 주신 달콤한 선물이라는 것을 ClarkKim, 전문, 자작시 2024 .04 .02 (화)
걷는다는 것은 단지 두 발로 땅을 딛고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옆으로 갈 수도 있고 때론 뒤로 갈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대각선으로 가기도 한다 걷는다는 것은 어찌 됐든 어디론가 가는 것이다 앞이든 뒤든,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두 다리를 뻗어 행하는 것이다 걷는 것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다 삶을 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걷지 않은 적 없었다 빗방울이 내 몸을 적셔도 걸었고 눈보라가 내 눈을 가려도 걸었다 목적지를 정해 간 적도 있었고 아니, 목적지가 없어도 걸어갔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언젠가 대지의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소원을 말할 기회가 온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삶이 끝날 때까지도 끊임없이 걷고 싶다고, 곧 올 현재를 향해 걷다가도 때로는 이미 지나버린 현재를 향해서도 걷..
가장 아름다운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가장 즐겁던 날이 나에게도 있었다 가장 사랑스럽던 날이 나에게도 있었다 지금 내 얼굴엔 반쪽짜리 나이테가 그득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가장 따뜻하고 싱그럽던 그 봄날이 있었다 ClarkKim, 전문, 자작시 2022 .03 .26 (토)
봄비 내리면 떠나간 여인이 떠오르고 봄비 그치면 다가올 사랑을 기다린다 봄비 한 방울 뺨을 타고 흐를 때 나는 떠나갔던 사람과 다가올 사람의 안녕安寧을 소망하노라 ClarkKim, 「봄비」 전문, 자작시. 2022. 03.26 (토)
가을 그리고 삶 조심스레 다가온 가을의 어느 날, 양평 단월의 아늑한 카페에 앉아 붉게 물든 나뭇잎을 바라본다 얇은 커튼 사이로 가을 풍경 찾아오고 따스한 햇살 조각 내 손등 위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나는 어디쯤 왔는가 내 생애의 절반쯤 왔는가 아니면, 그 끝에 다다랐는가 인간의 생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마치 처음의 네가 내게 말 걸어온 그날과, 마지막의 내가 너를 떠나보낼 수도 있음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가을은 그렇게 왔다가 가는 것이다 나에게로 왔다가 너에게로 갔다가 어디론가 떠나는 우리네의 삶처럼 그렇게, 가을은 간다 ClarkKim, 「가을 그리고 삶」 전문, 자작시. 2021. 11. 6 (토)
신발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신발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신발로 아스팔트 위에, 누군가는 모래 위에 역사를 남긴다 아스팔트 위로 걸어가면 신발은 깨끗하겠지만 자국이 남지 않는다 역시 모래 위를 걷는다면 조금 더러워지더라도 자국이 남는다 걸어도 되고 뛰어도 된다 설령 흘러들어온 바닷물에 자국이 지워질 지라도! 나는 언제라도 모래 위를 걸으며 살아 있는 역사를 남기고 싶다 ClarkKim, 「신발」전문, 자작시.
연 퇴근길 올려다 본 저녁 누군가 제멋대로 그린 바닷가, 모래사장 수평선을 응시하는 우리가 보인다 그때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연을 날리며 지나간다 봄바람에 소년의 머리카락이 그의 연줄이 가늘게 흔들리고, 모래를 털며 일어나는 너의 형체도 옅게 흔들린다 실만큼 가느다란 바람에 끊어져버린 너와의 연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꽉 잡은 소년의 두 손 그러나 손에서 벗어난 연, 그리고 너 나는 짙은 농도의 소금물을 머금은 바닷물이 연을 삼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ClarkKiM, 「연」전문, 자작시.